2011년, 한국에서 인도 영화의 인기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시기가 있었다. 그 중심에는 바로 영화 <세 얼간이>의 열풍이 있었다. 이 영화는 치열한 경쟁과 성공을 향한 갈망에 대한 비판을 날카롭게 던졌으며, 유머 넘치는 노래들은 발리우드를 한국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교육과 학력 경쟁에 대한 영화의 메시지는 한국의 현실과 맞물려 더욱 강력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영화 속에서 내가 특히 기억하는 장면은 대학 총장 비루의 대사였다.
"인생은 레이스다."
그는 신입생들 앞에서, 그들이 떨어뜨린 많은 지원자의 서류를 바닥에 흩뿌리며 성공을 위해 누군가를 밟아야만 한다는 냉혹한 현실을 전했다. <세 얼간이(2011)>는 각기 다른 주인공들이 자신의 꿈을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성공임을 보여주었다. 란초는 과학자의 꿈을 추구했고, 파르한은 공대를 졸업했지만 사진작가라는 꿈을 따라갔다. 그러나 이 영화가 준 교훈을 우리는 점점 잊어가고 있다. 여전히 성공은 대학 입학의 결과로 치부되며, 파르한과 라주가 어렸을 때부터 들었던 '더 좋은 학교'에 대한 강박 속에서 살고 있다.
2024년 10월, 대통령 직속 국가교육위원회는 대학 서열화를 해소하기 위해 수능을 절대평가로 전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최민지, 2024.10.04). 이 제안이 보도되자 많은 이들이 반발했다. 학습량의 차이가 존재하는데 서열화를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 한국은행 총재는 대학 서열화를 완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지역 비례제를 주장했다(한지훈, 민선희, 2024.08.27). 이는 모든 학생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는 방안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만으로 대학 서열화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는 비판도 있으며, 한국은행 총재가 교육 정책에 대해 발언하는 것이 적절한가에 대한 논란도 있었다. 통계에 따르면 서울대 진학자 중 32%가 서울 출신이라는 점(탁지영, 2024.10.08)은 '서울'이라는 지역과 기득권층의 학력 대물림이 일정 부분 이루어지고 있다는 반박으로 작용하고 있다.
우리가 잊고 있는 사실은 우리의 가치는 대학의 이름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망각한 채, 현실을 앞에 두고도 눈을 가리고 있는 것과 같다. 마치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보고 그것이 단순한 모자라고 주장하는 모습과도 같다. 오늘 필자는 이러한 왜곡된 현실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자 한다. 바로, <연소의 일기(2024)>라는 영화를 통해서다. 이 영화는 홍콩 영화이며, 1980-90년대의 홍콩 누아르와는 다르다. 액션 영화는 아니지만, 홍콩 영화의 부활을 기대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연소일기(年少日記)>는 제목 그대로 한 소년의 일기를 다룬 이야기다. 주인공인 정요우제는 초등학교 입학 후 '부진아'로 낙인찍힌 아이로, 부유한 부모의 자녀이다. 부모는 그에게 홍콩대(한국의 서울대에 해당) 진학을 강요하며, 학업뿐만 아니라 예체능에서도 뛰어난 성과를 내길 기대한다. 하지만 정요우제는 동생 정요우쥔에 비해 성적이 낮고 음악적 재능이 부족해 항상 비교당하며 매를 맞는다. 필자의 시선에서 본 정요우제는 여느 아이들과 다를 바 없다. 만화책을 좋아하고, 인형과 노는 것을 즐기며, 놀이에 흥미를 느끼는 평범한 아이일 뿐이다. 그러나 공부라는 절대적 가치 앞에서 이 모든 행위는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된다. 부모가 기대하는 '모범적인 자녀'의 모습에서 벗어난 정요우제는 그들에게 있어 '쓸모없는 인간'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정요우제의 일기 또한 한 선생님의 회상으로부터 시작되며, 그 회상의 이면에는 고등학교에서 발견된 '유서'와 연결된다.
홍콩의 한 고등학교에서 발견된,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기에 죽고자 한다"는 내용의 유서를 계기로 한 선생님이 유서의 작성자를 찾아 나선다. 마치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는 듯한 심정으로 학생들의 아픔과 이야기를 접하며 그들의 내면을 들춰본다. 아이들은 좋은 대학 진학을 목표로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최선을 다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서사는 부모의 기대에 부합하는 것에만 목적을 두게 된다.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그들은 자신의 '쓸모'를 의심하며 내면의 고통을 홀로 견뎌내는 법을 배우게 된다.
정 선생은 누군가의 일기를 복기하면서 '쓸모 있는 삶'을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는 과정을 회상한다. 이러한 과정은 많은 이들의 고민인 '쓸모 있는 삶'과의 조화를 이루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일기의 주인공인 정요우제의 서사는 자유로움을 포기하고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애쓰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려운 피아노 곡을 연주하려 무수히 실패하면서도 계속 도전하고, 성적을 위해 새벽까지 공부하는 등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완벽하지 않다는 이유로 부모에게 혼나며, 점차 '쓸모없는 인간'으로 전락한다. 정요우제는 절망에 빠질 때마다 옥상에 올라가 고함을 치며 자신의 답답한 마음을 달래 보려 애쓴다. 하지만 끊임없는 비교와 경쟁 속에서 점점 자신감을 잃어간다. 이 사라져 가는 자신감은 영화의 카메라 구도를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영화에서 카메라의 거의 모든 구도는 '인물'의 키와 맞닿아 촬영되었다. 특히 아이의 시선에 맞춘 카메라 높이는 어린아이가 바라보는 세상을 생생하게 연출한다. 이러한 촬영 기법은 아이가 혼나거나 맞는 장면에서도 일관되게 유지되며, 세상이 거대하고 벅차게 느껴지도록 한다. 이는 아이가 무력감을 느끼고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여겨지는 순간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연소일기>에서 주로 사용된 하이앵글과 아이레벨 앵글은 아이가 세상 앞에서 작아지는 모습을 강조한다. 이 구도는 아이의 역경을 보여주며, 그가 극복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더불어 영화의 전반에 걸쳐 흐르는 피아노 음악은 주인공의 처절한 노력과 감정을 더욱 강조하며, 관객에게 깊은 쓸쓸함을 전달한다. 이 음악은 아이가 피아노를 연주하며 겪는 고통과 인내의 과정을 더욱 부각한다. 사실 피아노의 경우, 정요우제에게 잘하고 싶은 것 중 하나이면서 동경하는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것 중 하나이다. 그 이유는 피아노를 통해 아이가 선생님이라는 꿈을 꾸고, 이 과정에서 자신이 되고 싶은 어른의 형상을 꿈꾸어 나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력이 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선생님은 교체되고 정요우제 역시 쓸모 있음의 굴레에 다시 천천히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이 피아노의 음률은 영화가 고조되는 과정에서 선생님이 일기의 주인공인 정요우제의 어린 시절을 교차해 회상하며, 그 아픈 기억이 다시금 고통 속으로 들어가는 계기가 된다.
카메라가 아이의 시선을 따라가면서 묘사하는 과정은 서사적으로 아이가 '나'를 스스로 학대하는 형태로 표현된다. 아이가 혼나고 낙제하며 비웃음을 당하는 과정에서 점점 자신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결국 존재 자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이는 사회의 부정적인 시선과 자기 갉아먹기 과정을 시각화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 학대는 사회의 시선 속에서 '버티지 못해서'라는 말로 간단히 덮여버린다. 사회는 자살을 단순히 '더 버티지 못한' 개인의 잘못으로 치부하며, 이로 인해 피해자는 오히려 가해자로 인식되는 역설적인 상황이 만들어진다. 주변 사람들이 조금만이라도 그 아이의 편에 서주었더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은 결코 고려되지 않는다. 즉, 영화에서 동생을 감싸 안고 오열하는 정요우제의 모습은 단지 무시되거나 귀찮은 일로 그려질 뿐이다. 정요우제에게는 누구도 그의 편이 되어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도 해방의 순간이 존재한다.


영화 <연소일기>에서 자주 등장하는 옥상은 아이에게 해방의 공간, 즉 '헤테로토피아'로 묘사된다. 그곳은 누구의 감시에서도 벗어날 수 있는 자신만의 공간이다. 옥상에서 아이는 세상을 향해 소리치며 활력을 되찾는다. 정 선생 역시 학생들의 고충을 해소하기 위해 언덕 위의 탁 트인 공간을 소개하며, 이를 통해 웃음을 되찾는 기회를 마련해 준다. 이 장면은 아이들에게 옥상이 해방의 공간임을 인식시키고, 어른에게는 감정을 해소할 수 있는 장소로 비친다. 정요우제에게 옥상은 '비밀기지' 같은 존재로, 자유로운 안식처다. 이는 정요우제가 동생 정요우쥔에게 옥상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두 형제는 옥상에서 함께 놀며 웃음을 나누고, 동생 역시 해방의 순간을 경험한다. 그러나 부모의 인식 속에서 동생은 형에게 '물들어서는 안 될' 존재로, 형은 '비뚤어진 아이'로 낙인찍힌다. 즉, 헤테로토피아라는 자신만의 해방 공간을 가지는 행위는 사회에서 성장하고 배우는 과정에서 어긋난 행동으로 여겨진다.
미셸 푸코는 자신의 저서 <헤테로토피아>에서 이 공간을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사이공간으로 정의했다. 푸코는 어린아이의 이불 속이나 원주민의 텐트 안과 같은 예시를 들며, 이 공간은 현실과 상상의 경계에서 자아를 해방하는 장소라고 설명한다. 정요우제에게 옥상은 상상의 공간은 아닐지라도 현실에서 도피할 수 있는 자유롭고 해방된 공간이다. 그러나 부모에게 옥상에서의 즐거움은 가치 없는 일로 치부되고, 옥상에서의 경험은 쓸모없는 것으로 낙인찍힌다. 그 결과, 정요우제에게 옥상은 더 이상 해방의 공간이 아닌 사라지는 장소가 된다. 즉, 자신이 인정받기 위해서는 '쓸모'를 증명해야 하고 옥상에서 노는 행위는 '쓸모'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나의 쓸모를 더욱 의심하게 만드는 요소가 된다.
옥상이라는 공간은 단순한 물리적 장소를 넘어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곳'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정 선생이 학생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사연과 고민을 들어주는 과정은 학생들의 마음의 공간을 만들어 주는 행위와 같다. 정 선생은 학생들에게 옥상과 같은 해방의 공간이 필요함을 역설하며, 학생들이 자신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누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돕고 싶어 한다. 이는 오늘날 친구이면서도 내일의 경쟁자가 될 수밖에 없는 교육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한국의 교육 체제에서는 학생들이 시험이라는 제도 안에서 서로를 경쟁자로 인식하며 누군가를 짓밟고 올라서야 한다고 여긴다. 이러한 대결 구도는 학생들로 하여금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게 만든다. 내면을 드러내는 순간, 그것이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화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 선생은 이런 감정을 받아주고 들어줄 공간과 사람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그가 과거와 현재를 되돌아보며 그가 깨닫는 중요한 사실이다. 나의 고민은 쓸모가 없다는 그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본 영화에서 지속적으로 다루는 질문인 "쓸모없는 인간인가?"는 주인공 정요우제의 이름에서도 드러난다. '요우제'라는 이름은 '특출난 인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부모의 시선에서 요우제는 쓸모없는 아이로 낙인찍힌다. 이는 사회가 말하는 '쓸모없는 인간'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이름에는 항상 뜻이 있으며, 그 뜻은 부정적이지 않다. 한자 이름은 등록 시 좋은 의미의 한자만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이름은 자신의 쓰임새를 강조하며 더 높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 있다. 예를 들어, 필자의 이름이 '별 성(星)'과 '빛날 현(炫)'으로 해석되어 '별같이 빛나는 사람'을 뜻하듯이 말이다. 이처럼 모든 이름은 소망과 기대를 내포한다. 그러나 이 염원이 반드시 사회적 성공을 위한 의무감을 만들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이 영화를 보며 필자는 "세상에 쓸모없는 인간은 없다"라는 문장을 반감 어린 시선으로 보게 되었다. 우리는 모든 작품과 상품에서 쓸모를 찾고, 쓸모가 없다고 여겨지는 것은 그 가치가 떨어진다. 영화가 보여주는 사회의 표상은 인간의 쓸모가 '성적'이나 '봉급' 같은 가격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을 던진다. 이러한 교훈은 동아시아, 특히 아시아의 문화적 특징과도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정요우제가 느끼는 "홍콩대에 가야만 한다"는 의무감은 오늘날 의대나 치대, 한의대에 진학하려는 학생들의 외침과 비슷하다. 수도권 대학이 아니면 안 된다는 한국인들의 강박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내신이나 수능에서 1등급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는 9등급을 받아야 하는 사회 시스템에서 '모두가 공부를 잘할 수 있다'는 환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등급은 사회 속에서 내가 얼마나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지는지를 보여주는 지표가 될 뿐이다. 이는 '멍청이가 아니면 4-5등급은 맞는다'라는 비하적인 말이 순위 경쟁의 비열함을 얼마나 노골적으로 드러내는지 오늘날의 학구열이 잘 보여준다.
이 지점에서 다시 묻는다. '쓸모'는 누가 정하는가? 과연 세상의 쓸모는 누가 규정하는가? 사회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학력이라는 쓸모와 위치에 대한 기준이 과연 얼마나 효과적인지에 대한 질문은 언제나 찝찝한 여운을 남긴다. 결국, 나의 쓸모는 누가 정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남게 된다. 그러나 세상이 바라는 쓸모와는 다르게, 적어도 내가 어디에 쓰이고 싶은지에 대한 희망과 쓸모의 가치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제언을 던져본다.
박성현.
[참고기사]
최민지 (2024.10.04). “대학 서열 완화하려면 수능 절대평가 해야”…국교위 정책연구. 서울: 중앙일보, URL: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5/0003391120?sid=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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