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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제, 무명으로 살아가는 은둔자
콘텐츠 비평/영화

쓸모 없는 도전은 없다...(Last Holiday, 2006)

by 이름 없음의 방랑 2025.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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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홀리데이
뉴올리언스의 주방용품가게 점원 조지아 버드는 수줍음 많은 평범한 여성이다. 어느날 그녀는 직장에서 머리를 크게 부딪치는 일을 당하고 병원에 실려간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큰 병에 걸려있으며 앞으로 살 날이 몇 주 남지않았다는 청천벽력 같은 선고를 듣게 된다. 낙심한 그녀는 그녀가 살아오면서 희망사항으로만 여기고 미처 해보지 못한 것들을 하나하나 실천에 옮기길 결심한다. 그녀는 꿈에 그리던 유럽의 휴양지로 '마지막 여행'을 결심하는데,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한 그녀는 그곳에서 대담한 모습으로 변신한다. 그런 그녀의 변신은 주위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녀는 꿈에 그리던 요리사 디디에를 만나고 마침 그 곳으로 휴가를 온 그녀의 악덕 업주, 상원의원 등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신분을 알지 못하는 그들은 그녀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하다.
평점
8.9 undefined
감독
웨인 왕
출연
퀸 라티파, 엘엘 쿨제이, 티모시 허튼, 지안카를로 에스포지토, 알리시아 위트, 제라르 드파르디외, 제인 아담스, 수잔 켈러맨, 매트 로스, 랜짓 초우드리, 마이클 누리, 재클린 플레밍, 단 지스키, 엘런 사브리아, 존 윌멋, 스모키 로빈슨, 잔 웅어, 줄리아 라쉐, 라나 리킥, 블라디미르 쿨비, 할리 베일리

 

It's never too late to start living.

영화 <Last Holiday(2006)>에서 조지아 버드가 이야기한 대사다. 살기에 절대 늦지 않았다는 말은 세상을 사는 과정에서 '늦다'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음을 이야기한다. 그녀는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서, 무언가를 실천하지 않는 시간은 '버리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러한 실천은 그것이 남들이 보기에 '쓸모 있다'라고 느껴지지 않더라도,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언급한다. 사실 조지아 버드의 행동은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벌어진다. 그리고 이는 '죽음'이라는 이유가 모든 도전, 다시 말해서 흥청망청 쓰는 탕진이라는 행위를 정당화시킨다. 하지만 그녀의 그러한 행위는 우리가 인생을 사는 과정에서의 고전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지식, 살기 위해서는 나태하지 않은 노동을 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에 많은 영향을 준다. 누군가는 이 이야기를 고전적이고 뻔한 이야기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이데올로기, 지식과 규율에 던지는 화살은 '늦음'을 방지하게 만든다.

 

<Last Holiday>는 마트 식기판매원인 조지아 버드가 병원에서 시한부를 선고받으며, 벌어지는 일들이다. 어느 날 회사에서 쓰러진 조지아 버드는 병원 MRI검사에서 전염병에 대한 진단을 받는다. 그리고 의사는 치료를 하지 않으면 그녀가 3주 안에 사망할 것이라고 언급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보험은 수술에 대한 비용을 지원하지 않고, 수술비는 보험 없이 수십만 달러에 달하는 비용이기에 그녀는 포기하고 집에 돌아온다. 집에 돌아온 그녀는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꿈의 책을 펼치며, 자신이 달성하지 못했던 미래에 대한 꿈을 후회한다. 하지만 후회는 잠시, 이제라도 실천하기로 결심한 그녀는 다음 날 회사를 관두고 바로 체코의 풉 호텔로 향한다. 자신이 경험하고 싶던 요리사 디디에의 요리를 맛보기를 위해서 말이다. 1분 1초, 자신의 남은 삶에 불편함이라는 요소에도 불쾌했던 그녀는 체코를 향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과감함을 선보인다. 좁은 이코노미 좌석에 그녀는 일등석의 좌석을 과감히 구매하기도 하고, 오래 걸리는 택시보다 헬리콥터를 빌리며 호텔로 들어온다. 그녀의 존재에 놀라던 호텔리어들은 그녀를 부유한 사람으로 착각하고, 그녀가 묵기로 했던 방이 준비되지 않자 프레지던트 스위트로 업그레이드하는 모습에 더 주목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들에게 말하지 않았을 뿐, 단순히 노동자였으며 남은 삶을 살고자 하는 여성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모든 행동이 세간의 주목을 받으며, 자신이 사는 지역의 국회의원의 관심과 전 직장의 회장에게 시기질투를 유발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심은 부르주아들의 특별요청과 달리, 빼놓지 말고 모든 것을 포함해 달라는 요리 주문을 통해 로망의 요리사 디디에의 귀에도 들어갔고, 디디에는 버드의 행동에 감동받는다. 이러한 버드의 행동과 노동자라는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대하는 태도는 호텔리어들의 경애를 얻으며, 호텔 안에서의 인지도는 더 높아만 간다. 하지만 그녀는 시한부 인생을 사는 처지로써 꿀리는 것이 없었고, 단지 자신이 노동자였음을 언급을 안 할 뿐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국회의원과 상공회의소 회장, 회사 회장의 비서와 함께 어울려 다닌다. 물론, 이러한 버드의 행위를 달답게 보지 않았던 전 직장의 회장은 그녀의 정체를 밝히고자 애를 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영화 후반부에 밝혀진다. 하지만 버드의 행위, 친절함, 가치관에 감동한 사람들은 버드를 돕는다. 회장 역시 그녀의 입지에 굴복해 인생의 후회를 느끼지만, 버드는 그의 후회까지 보듬으며 인생은 지금부터라는 가치관을 심어준다.

 

회장의 비서, 내연녀는 버드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한다. "버드는 여기에 일하러 온 것이 아니에요. 그녀는 단지 즐기러 온 것일 뿐이에요"라고 말이다. 이는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데에, 무엇이 휴가이고 일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삶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골프와 테니스를 배우며, 사교관계를 만들려고 한다. 더불어 등산동호회는 직장 동료 혹은 상사와 함께 가는 일종의 활동으로도 여겨져 왔다. 취미를 취미로 하지 못하는 우리의 행위들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만드는 것이다. 누군가는 돈을 왜 그런 곳에 쓰냐고 물어보는 경우가 존재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오늘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있고, 충분히 할 수 있는 능력이 되는데도 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할 필요성'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하는 행위를 스스로 감시하며, '생산성'이 있는지 수지타산이 맞는지 계산한다. 머릿속으로 수없는 계산기를 두드린 다음에 우리는 실천을 결정한다. 그러나 이렇게 만드는 유순한 신체는 단지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하는 것이 아닌, 나에게 그 행위가 도움이 되는지 결정하게 만든다. 이는 내가 하는 모든 행위가 '쓸모없으면 안 된다'는 타당성을 얻게 한다.

 

사람에게는 '때'가 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때'라는 순간은 언제인지 물음표가 던져진다. 나는 어느 순간에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지 기다려야만 하는지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들, 하고 싶다고 의지를 불태웠던 순간들은 지나 '이제는 안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남는다. 이는 버드가 초반에 '꿈'은 꿈일 뿐이라며, 책으로 남겨놓았던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버드가 얻는 이야기와 같이, 더 늦은 때는 없다.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으며, 미래로 갈 수도 없다. 미래는 확장되고 있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빅뱅이라는 우주의 시작은 우주를 확장시켰다. 그리고 그 확장의 순간순간마다 우리의 시간은 미래로 나아가고 있다. 우주가 축소되는 날이 있나?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신체는 늙는다. 즉, 종료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종료의 순간은 누구도 모른다. 그럼에도 '종료'가 일어나는 시점이 가장 늦은 순간이라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종료를 맞지 않은 지금은 늦은 순간도 아니며, 아마도 내가 실천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시기일 것이다. '때'는 바로 지금이다. 내가 실천을 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인 것이다.

 

지지난주 나는 올해 안으로 비즈니스석을 타고, 해외여행을 가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곳이 어디든지 비즈니스석을 타고 갈 것이다. 물론, 누군가는 젊은 나이에 돈을 펑펑 쓴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알까? 내가 그 돈을 모으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 자격은 누가 부여하는 것인지에 대한 결론을 말이다. 아마도 잘 모를 것이다. 단지 사회에서 결정한 '시선' 속에서 비즈니스는 나와는 다른 부르주아 계급이 타는 것이며, 프롤레타리아인 나는 이코노미만 타며 여행을 해야 한다는 것을 답습하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는 다 그렇다. 내가 무엇을 사고, 어떠한 취미를 가지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평가한다. 마치, 영화에서 버드가 호텔에서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는 행위를 사람들이 평가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시선'이라는 단어, '눈치'라는 단어가 만들어내는 나의 사회적 위치는 나를 억압한다. 푸코가 언급했던 것처럼 나 자신을 유순한 신체로 만들며, 지식 권력에 의해서 나의 행위를 평가하고 답습하게 만든다. 그러나 사회적인 평가는 어쩌면 '내'가 스스로 생성한 것임은 틀림없다. 나의 행위를 둘러싸 만들어진 담론은 다시 나에게로 돌아와, 마치 내가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마치 '때'에 안 맞는 사람처럼 보이거나, 내가 사회에 오해를 불러일으켜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오늘 내가 하는 행위는 내가 만든 '때'인 것이다.

 

2025년 3월 18일 새벽, 눈이 왔다. 누군가는 입춘이 지난 시기에 이렇게 눈이 오다니, 세상이 말세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지구는 지구의 나름대로 행위를 하고 있다. 오늘은 눈이 올 때였던 것이다. 그리고 사회는 이를 이상한 세상이라고 언급할 뿐이다. 나 또한 오늘 하는 행위에 대해서 재단할 생각을 하지 말자. 단순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것이고, 그것이 사회적으로 별로 좋지 않은 시선을 불러일으켠다고 해도, 그것은 사회적 시선일 뿐이다. 물론, 사회의 윤리적이고 규율적인 측면은 따라야겠지. 하지만 내가 꿈꿔오던 것들을 해보는 행위는 사회적 시선을 피할 필요가 없다. 유순한 신체가 되지 않는 자주적인 신체가 되기를 기원해 보며, 이 글을 써본다.

 

3월의 눈을 바라보며,

박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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