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무제, 무명으로 살아가는 은둔자
책 요약 및 후기

'이데올로기'의 재발견: 미디어 연구에서 억압되어 있던 것의 복귀

by 이름 없음의 방랑 2024. 11. 4.
반응형

*Hall, S. (1982). The Rediscovery of 'Ideology': Return of the Repressed in Media Studies. Micheal Gurevich et al. (eds.). Culture, Society, and the Media, London: Methuen. 임영호(역)(1996). "이데올로기의 재발견: 미디어 연구에서 억압되어 있던 것의 복귀". <스튜어트 홀의 문화이론>. 서울: 상지사235-286.

 

들어가며

미디어 연구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많은 연구가 떠오르기 마련이다. 그중에서도 방법론적 구분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고 보는데, 미디어 효과 연구에서 보이는 수치적 연구(양적연구) 거나 사회학 혹은 문화학을 기반으로 둔 질적연구를 대표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를 두 가지의 방법론적 구분으로 섞일 수 없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미국적 미디어 연구라고 한다면, 대부분 양적 연구가 주류를 이르고 있으며 '미디어 효과'연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번 텍스트의 저자인 스튜어트 홀(Hall, S.) 역시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1982년의 미국의 학술적 흐름이 사회학적인 흐름으로 바뀌면서, 이번 텍스트의 제목인 '복귀'라는 단어와 같은 사회학의 강조가 나타났음을 확인할 수 있다. 홀은 서론에서 미국의 주류 행태의 "과학의 사회학적 접근 방식"이 쇠퇴하면서 '비판적'패러다임이 등장한 시기를 구분한다(235). 그리고 이 시기 두 가지 단절을 주장하는데, 바로 '주류의 접근 방식과 비판적 접근 방식의 차이' 그리고 '이 시기의 시각적 이동'에서의 단절이었다. 

 

첫 번째 단절

  홀은 '주류'의 접근 방식이 행태주의(행태를 중심으로 사회현상을 객관적, 실증적,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사회심리학적 연구방법)적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폭력적인 미디어를 많이 보는 사람은 폭력적으로 변화한다거나 행동이 변화한다는 등의 연구가 많이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행태주의적'이었다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두 가지로 나뉠 수 있었는데, 첫 번째는 미디어가 노출된 개인의 변화를 보는 -앞서 언급한 사례 연구와 같은- 것이며, 두 번째로는 방법론적 접근에서의 실증주의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실증주의적인 것이 홀이 보기에는 미디어 연구를 '단순화'시킨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러한 행태주의적 접근이 강조되었던 것에서 다소 이유가 있다. 가장 먼저 현대 미디어가 현대 산업에 미치는 영향을 보는 관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며, 이어서 현대사회의 대중성이라고 일커러지는 '대중문화'가 오히려 문화 생산 혹은 정치경제학적인 부분에 관심을 나타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홀은 자본주의의 발전이 깊숙한 사회적 관계 즉,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들을 등지면서 오늘날 평가절하되는 방식으로 변모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모는 오히려 행태주의적 접근방식의 하위 분야에 들어가게 되면서, 문화적인 것(대중문화로의 대체 및 고급문화의 타락)/정치적인 것(대중을 속이거나 선전하는 것)/ 사회적인 것(공동체 사회, 중간적인 것)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프랑크프루트 학파는 이러한 변모적 시기에서도 대중적인 것에서 발생될 수 있는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것들에 대해서 우려를 표했으며, 이에 따라 전체주의의 징후를 지적한다. 하지만 이는 미국 사회과학자들이 '다원주의'라는 이름 아래에서 낙관적으로 대응하는 방식으로 뒤쳐진다.

  사실 이러한 대립의 과정은 홀이 행태주의적이라고 언급한 두 번째 이유를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대륙의 미디어연구와 미국의 미디어연구의 연구 방법적 차이였다. 유럽식 접근 방식은 역사적이고 철학적이며, 포괄적이고 사변적이며, 의미심장하지만 지나치게 일반화했다. 그러나 미국식 접근 방식은 경험적이고, 행태주의적이었으며, 과학적이었다. 더불어 경험적 증명이라는 단어는 사람들이 사실이 있음을 존재하게 되는, 그리고 그게 가능하다는 믿음을 존재하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유럽식 비판이 행태주의적인 접근을 통해서 권력을 이론화하는 방식으로 전환하게 되었으며, 이는 A가 B를 통해 X라는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가설과 이론을 형성하게 한다. 미국식 접근 방식은 행태주의적이고 경험주의적이라는 강점과 함께, '정책연구'라는 타이틀을 달면서 더욱 상업적인 측면을 부각했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 구조에 실제로 적용할 수 있는 모델로 작용하면서 정치적인 문제들과 사회적인 문제들, 그리고 정치경제학적인 문제들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홀은 이 문제들이 사라지게 된 이유가 변수에서 벗어나있기 때문이라고 언급하는데, 과학적인 것은 이데올로기적인 것에 준거하면 아니 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유럽식 접근 방식은 '다원주의'라는 이름 안에서 '왜 다원주의가 작동하는가?'라는 질문 대신, 다원주의가 이미 작동하고 있음을 상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홀은 이를 잔혹하고 완고한 행태주의라고 지적하면서, '순수과학'이라고 통칭하려 하는 실증주의적인 질문들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미국식 접근 방식은 사회적 가치들, 다시 말해서 계급과 경제적 과정, 그리고 권력관계를 '합의'라는 단어로 환원했다. 즉, 사회적인 것들은 이미 합의되고 지배되는 것들로 상정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핵심적인 가치들'은 이미 가치에 대한 합의가 존재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는 일련의 '담론의 구조'를 살펴보면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푸코(Foucault)는 담론은 텍스트가 발화(실천)에 의해서 사회적 관계를 맺고, 이를 통해 형성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 다원주의와 '합의'라는 단어는 이미 사회적 관계가 맺어져 있음을 상정하고 이야기하는 것으로써, 담론을 통해 사용자들이 어떻게 행위가 전환되는지만 보게 된다. 쉽게 말하자면, '영어를 배우는 것은 중요하다'라는 일련의 법칙이 '영어가 왜 중요한가'라는 방식을 제외하고 '이미 우리는 영어는 중요하다고 사회적으로 합의 됐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가치는 일종의 성스러운 권력으로 '파괴'되면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홀은 사실 미국의 미디어 연구 접근 방식이 계급 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유지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즉, 다윈주의가 이야기하는 '평등'은 흑인, 여성, 불법체류자, 인디언 등과 같은 다양한 요소들을 다 같게 만들어 버린 근대화된 이론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저자는 이 지점에서 앞서 말한 '인종' 및 '젠더'적 문제가 다 같게 만듦으로써 아마 그들-흑인, 여성, 불법체류자, 인디언 등과 같은 소수자-에게는 좋은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과연 좋은 일이었을까? 오히려 일반인의 기준에서 그들을 더 궁지에 몰고, 파편화되어 숨겨버리는 일을 만들게 되었을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게 된다. 그렇기에 홀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결론 속에서 '이데올로기'라는 문제는 다원주의적 갈등을 불러일으켜는 존재로 받아들이며, '합의'라는 단어로 종결시켜 버렸다. 

  사실 이러한 미국식 접근 방식, 즉 다원주의 모델이 각광받는 이유는 바로 '아메리칸드림'이라는 방식 아래서 작동될 수 있었다. 아메리칸드림은 모든 이주민의 성공이라는 방식으로 여겨졌고, 이는 경험적으로 증명되었다. 그리고 이는 앞서 언급한 일반적인 사회 과학 모델에 접합되는 방식을 만들었다. 하지만 1960년대의 봉기 혹은 운동에 대한 마땅한 해설을 내놓지 못한 것은 다원주의가 스스로 쇠퇴하게 만드는 길로 접어들게 하였다. 그리고 이 순간에 이데올로기적 관심은 미디어와 미국식 접근 방식에 접합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즉, 개개인의 행태 변화와 경험적으로 관찰 가능한 행태의 차이로 이어지는 영향에서 '기호와 해독'이라는 메커니즘이 발견된 것이다. 메시지는 생산자의 의도를 반영하는 것으로 간주되며, '커뮤니케이터'라는 전달자를 통해 수신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주목한 것이다. 그렇기에 미디어는 전달자라는 순단에 불과한 장치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완전하지 못한 사회학적 접근은 미디어가 사회적 합의를 전달하는 매체로서 작용하고 있다는 것과 가치와 규범을 보장한다는 개념들이 형성하게 만들었으며, 이 과정에서 개인이 나름대로 선택적으로 정보를 취합할 수 있다는 지각 개념이 들어섰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도 언젠가는 주목받던 '이데올로기적 접근'은 무시하고 보편적이며 범역적이라는 범위 내에서 '다원주의'를 강화시키고 있었다. 

 

두 번째 단절: 사회학적 접근의 합의

 다원주의가 사회를 일반화하는 부분에 대해서 한계가 드러나는 시기에 홀은 두 가지의 단절이 발견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첫 번째로는 '합의'라는 단어에 대한 용어이며, 두 번째는 '상황의 정의'라는 개념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먼저 첫 번째인 '합의'라는 것은 일종의 규칙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부분에 대한 정의가 필요했다. 홀은 이 과정에서 경험적으로 확인 가능한 집단들을 배제하고, 다른 집단들을 규정하는 과정에 돌입했음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다른 집단'을 일탈자들로 규정하기 시작했고 '하위문화'로 정의했다. 홀은 이를 하위문화와 지배문화라는 관계 속에서 제도에서 벗어난 것에 대한 '상황적 정의'를 학습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위문화는 지배적 합의에서 규칙에 어긋나는 것에 대한 '치료'가 필요함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러한 치료가 필요함, 일탈과 어긋남에 대한 정의는 사회적으로 일어났다. 즉, 권력자들과 일탈자들 간의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권력에 연루되어 설정된다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설정은 '사회적 통제'와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수행된다. 그렇기에 다원주의는 규율권력과 함께 합의된 상태로 유지된다. 홀은 이러한 합의를 미디어가 이행한다고 보고 합의된 상황 정의를 재생산하는 경향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다원주의와 사회학적 접근의 합의는 합의하는 과정에 있어서의 미디어 역할을 추적하게 만든다.

  홀이 그 과정에서 설정하는 두 번째 단절은 '상황의 정의'에서 사물을 어떻게 정의하고, 미디어의 반영 역할에 대한 비판을 제기한다. 즉, 미디어가 현실을 단지 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정의하기도 하기 때문이다(247). 미디어는 이 과정에서 현실을 재생산하고 다시 정의한다. 이는 전달의 역할뿐만이 아닌 실천의 역할로 전환되면서, 사물들이 의미를 갖는 능동적인 노동으로 바꿔놓았다. 미디어가 실천적인 '수행자'의 역할을 하게 되면서, 미디어가 이데올로기적 구조화를 분석하는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즉, 미디어가 다른 사람들을 희생하면서 만들어버리는 가치, 신념, 의식, 제도를 보증하고 권력 문제를 다시 끌어올렸다. 홀은 미디어가 다원주의를 재부활시키면서 권력이 다원화되고 오히려 욕구를 결정하는 환경 전반을 형성했다. 다시 말해, 질서를 재현하고 이를 더 공고히 만들면서 모두가 같은 선상아래서 평가를 한다고 착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데올로기'의 설정은 과거와 달리 더욱 공고해지면서도 지속적으로 주목을 유도했다. 

 

나가며: '과학'이라는 깊은 신뢰감에 대한 불신

한 동안 생각했다. '과학'이라는 것은 정말 불변한 것인가라는 의문점을 말이다. 며칠 전 모 유튜버가 과학은 인문학과 다르게 주관성을 띄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인문학적 과학이라고 언급하면서, 소설이나 음악과 같은 지극히 주관적인 감상평과는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소설이나 음악이 나타내는 결론과, 과학이 나타내는 결론은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요즘 필자는 모 방송사의 입시 성적 관리 프로그램을 종종 즐겨보는 편인데, 해당 방송에 출연하는 수학강사는 '다채로운 수학 풀이 방식'을 강조한다. 즉, 결과가 정해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증명하는 방식은 다양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 사회는 '과학'이라는 이름 아래서 획일화된 풀이방식과 결과를 도출하는 것이 정도와 정답으로만 말해지는 것을 아닐까 우려된다. 

홀이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획일화된 풀이방식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 사회라는 범주 내에서 '운동'이나 '혁명'과 같은 헤게모니들을 이야기하는 것들은 우리 사회에 존재하게 된다. 그러나 이를 단순히 소수자의 바람, 모든 것이 평준화된 세상에서 불만을 이야기하는 사람으로 치부되지는 말아야 한다. 그것이 사회가 이데올로기를 무시하면 발생하는 일들일 것이다. 그렇기에 단순히 다원주의와 행태주의를 언급하며, 모든 것의 공평함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사회 구조를 이해하기는 힘들다. 질적연구는 이러한 과정에서 구조화되지 못하고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이데올로기'를 관찰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미디어 연구는 구조라는 틀 안에서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작동하고자 하는가를 바라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시청자는 텍스트를 해독할 것이다'라는 큰 틀 안에서 과연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작동하고 수용자마다 어떤 다른 방식으로의 해독이 가능한지에 대해서 보는 방식들을 말하는 것이다. 홀은 이러한 과정이 행태주의가 이데올로기와 함께 접합되면서 발생된 과정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사실 텍스트를 읽는 과정에서 본 글이 방법론적으로도 이론적으로도 시사하는 바와는 달리,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에 중첩된다고 생각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과학의 불변성을 믿는 것부터 우리 사회가 매우 일방향 적으로 흐르는 것과 같은 현상들을 말이다. 정부에서는 마이스터고등학교부터 특성화고까지 다양한 방식의 고등학교과 진로(오히려 노동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계획들을 언급한다. 하지만 사회가 그것을 받침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든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대학을 잘 가야', 혹은 '수능을 잘 봐야'한다는 목메달음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사회현상은 성인이 되어서도 나타난다. 속히 기성세대들의 "일찍 장가가야지?" 혹은 "언제 취업할래?", "지금 다른 애들은 이것도 한다던데"와 같은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그들에게 뒤처지면 안 된다는 일종의 이데올로기 재생산을 요구받고 있다. 그러나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과연 우리가 말하는 '성숙한 어른'은 '성숙한 노동자'를 지칭하는 것이 아닐까? 과연 현재의 이데올로기는 우리를 어떠한 다양성을 가진 어른으로 변화하게 만들어가고 있는가를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