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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제, 무명으로 살아가는 은둔자
책 요약 및 후기

증명과 변명(2024) : '한국 남성'의 굴레 속에서

by 이름 없음의 방랑 2026.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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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 1월, 서울 마포구에서는 서부지방법원이 폭도들에게 점거당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소위 서울서부지방법원 점거 폭동사태라고 불리는 이 행위는 탄핵을 반대하는 극우 세력이 주도한 사건이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주목되는 과정은 20대 남성이 주로 포착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실제로 구속영장이 신청된 66명 중에서 29명이 20대와 30대였고 '남성' 위주를 뉴스에서는 주목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일명 투블럭남(2006년생)이라고 불리는 심씨는 법원 방화 시도에 대한 건에 대해 지난 8월 1일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사건의 변론 과정에서 범행을 반성함과 동시에 범행 당시의 연령이 만 19세가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형량이 감량되었으나, 사실 그가 선고 직후 "소년범 전과 하나 없는데, 인생 망했다"라고 울면서 외쳤다는 보도는 반성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재고해보게 한다. 다만, 우리가 여기서 볼 수 있는 사실은 왜 남성은 극우화되어 보이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당연하게도 이 극우화라는 단어를 모든 남성에게 뒤집어 씌우기는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정치적으로 만들어진 극우화된 남성성을 오히려 내가 역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원인은 정치적으로 만들어낸 '이대남'이라는 프레임과 함께, 오히려 남성을 제도 내에서의 피해자로 위치시키는 선거철 선전문구는 오히려 남성을 기득권자가 아닌 피해자로 위치시켰다. 따라서 모든 남성을 극우화된 인간으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이는 제도와 정치적 갈등 또한 남성을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며, 그렇기에 제도적 문제를 다시금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오늘 소개할 <증명과 변명(2024)>은 과연 '한국사회의 남성성'을 몸으로 익힌 남성이 어떠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단초를 제공한다. 저자인 안희제 작가는 자신의 친구인 우진의 이야기를 통해 과연 한국에서 한국남성으로써 살아가는 것이 어떠한 위치성을 가지고 경험을 제공하는지 설명한다. 그 과정에서 저자는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는데, 과연 한국 남성을 그렇게 만드는 요인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지속적으로 던진다. 그리고 'K-타임라인'은 한국 남성을 일종의 공장의 생산물 중 '정품'으로 양산해 버리는 구조적인 이데올로기로써 작동한다는 점을 밝혀낸다. 물론, 'K-타임라인'은 한국 남성 만의 표준상 만을 그려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한국 남성에게 기대하는 기득권의 세력과 억압적인 현상은 '정품'에 대한 인식을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저자인 안희제는 자신에게 '폭탄목걸이'를 걸어 2024년 말까지 목표를 두고 실패하면 죽겠다는 우진의 이야기를 이 책에서 담아내고 있다. 그렇기에 우진의 이야기는 K-타임라인에서 실패하여 마지막 삶을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의 성찰적 분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증명과 변명(안희제, 2024)>

 

재생산 위치에서의 남성

 
  과연 한국 사회에서 남성을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 저자는 우진의 언급을 통해 남성이 여성을 대상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진은 기독교인으로서 혼전순결을 유지하고자 했지만, 성인이 된 이후 ‘번따’라는 행위를 통해 여성을 대상화하고 있었다. 저자는 ‘도태남 인권운동가’를 언급하며, 국가가 여성과의 연애를 주도적으로 추진해 사회적으로 평등하게 재분배해야 한다는 ‘연애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발언을 인용한다. 그러나 이는 연애를 사회의 의무적 조건으로 규정함으로써 여성을 대상화한다. 특히, 여성을 자산처럼 여기고 여성과의 연애 횟수를 일종의 자산으로 취급하여 도구화한다. 저자는 이러한 시각이 우진의 사례에도 나타난다고 보았다. 우진이 ‘번따’를 하는 과정에서 여성을 대시 대상으로 보며 소비하는 행위로 해석한 것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국가·제도·이데올로기적으로 형성된 ‘연애’라는 형식에 주목해야 한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모태솔로 남성이 어떠한 취급을 받는지를 묻고, 그 결론이 ‘이상한 사람’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렇기에 남성은 여성과 연애를 하면서 일종의 성관계 기술을 배우고 성관계의 권리를 가지며, 연애 경험이 있는 남성, 즉 ‘인기 있는 남성’으로 자리매김한다. 이는 가부장제 속 남성성으로서 성관계 중심사회(Sexusociety)에서의 유성애(allosexual)에 집중하게 만든다. 즉, 섹스 중심사회에서 섹스의 부재는 친밀성의 부재로 이어지며, ‘매력적인’이라는 단어를 더욱 각광받게 만든다. 우진은 이 과정에서 자신의 매력을 시험하고 권리를 가질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창구로 ‘번따’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번따’에서 연애의 선택을 여성에게 맡긴다는 점에서 우진은 여성을 대상화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사실상 여성을 가질 권리가 남성에게 있다는 시각에서 ‘여성을 소비’한다고 읽힐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창구와 권리는 ‘남성’을 시험대에 올려놓는다.
  한국 사회에서 요구하는 남성성에서 섹스와 연애는 일종의 정상적 남성성의 잣대로 작용하며, 그렇기에 남성은 여성을 더욱 갈망하게 된다. 다시 말해, ‘정상적인 남성이라면’이라는 기준에 부합하고자 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것이 남성의 폭력성을 변명하는 방식으로 읽힐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남성은 이성을 소비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일반화의 오류라고 할 수 있다. 필자가 느낀 우진의 소비 형태가 바로 이를 보여준다. 필자는 우진이 사회적으로 형성된 이데올로기 속에서 ‘정상인’으로 보이기 위해 수십 번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정상인으로 보이고자 하는 욕망을 품고 있었다고 보았다. 우진은 단순히 행위자나 주도자로 보이기보다는, 사회적으로 구성되어 ‘대중 집단’에 편입되기 위해 발버둥치는 소수자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가 생각하는 자신의 사회적 위치는 이러한 성향을 더욱 강화한다. 재수가 아닌 4 수라는 사회진출 지연과 대학 자퇴 속에서 스스로를 실패자로 낙인찍은 우진은, 어쩌면 ‘연애’라는 사회적 기준에 다시 의지했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연애’는 폭탄 목걸이를 풀 수 있는 절대 조건은 아니지만, 자신이 정상임을 시험해 볼 수 있는 일종의 창구이자 돌파구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누구도 한국사회에서 남성이 연애를 해야한다고 우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남성이 연애를 못한다는 행위는 일종의 '흠'이라고 여기는 이데올로기를 형성했다. 마치 28살의 모테솔로는 이상한 놈이라는 눈빛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예능 <모테솔로지만 연애는 하고 싶어(2025)>는 연애를 못하는 존재로써 연애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주목한다. 그리고 모테솔로는 일종의 '전문가의 도움'으로 연애를 시작함으로써 연애를 해볼 수 있게 만들었다. 필자는 연애를 강조하는 사회에서 남성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에 정확한 답을 생각할 수는 없다. 다만, 연애와 섹스를 통해 재생산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은 남성을 억압하게 만든다. 저자 역시 이 지점에 주목하며 성관계 중심사회, 섹스중심사회를 언급하게 되는 것이다.
 

'K-타임라인'이라는 굴레와 20대 남성

 
  저자는 이 과정에서 K-타임라인을 언급한다. 'K-타임라인'은 3장에서 언급되는 내용인데, 바로 한국사회에서 설정한 20대 후반까지의 인생 사이클이다. 저자가 언급하는 인생사이클은 '학업-대학-군대-대학-취업-결혼'이라는 사이클로 이루어진다. 고등학교 졸업함과 동시에 대학을 가고, 대학 새내기를 누리다가 20대 초반에 군대를 간다. 전역 후 한국 청년 남성은 다시 대학에 복학해 취업준비를 하다가 졸업을 하며, 알아주는 대기업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20대 후반 혹은 30대 초반에 결혼을 결심하게 된다. 여기서 대학은 소위 '인서울'이라고 불리는 대학을 의미하며, 취업은 대기업을 의미한다. 한국 남성이란 안정적으로 끊임없이 노동을 준비하며, 성공한 상징자본을 가져 결혼하는 것을 꿈으로 설정하게 된다. 우진은 그러한 타임라인에 빗대어 보았을때에, '탈 K-타임라인'을 한 존재가 된다. 몇 년씩 도전한 대학입시에 늦어버린 군대, 그 과정에서 대학을 자퇴하는 행위까지 뭐 하나 맞아떨어지는 것이 없다. 따라서 우진은 자신을 비정상인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를 나 또한 '한국 남성'이라는 규범 안에서 논의하고 싶지는 않다. 모든 것을 쟁취해야 하는 '인간'으로 규정한다면, 한국의 K-타임라인은 꽤 복잡하고 정교하게 구성된 메커니즘이기 때문이다. '한국 여성'의 굴레에서도 K-타임라인이 작동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울러 한국 여성에게 K-타임라인은 더욱 비참하게 그려질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청년으로써 만나는 K-타임라인은 어쩌면 더 비참하게 자신을 그리게 만드는 도화지라고 볼 수 있다. 필자는 소위 인서울의 대학을 나오지도 않았고, 대학원에 들어오면서 K-타임라인의 범위에서 벗어났다. 누군가는 넌 취업 대신 대학원을 선택했으니 된 거라고 위안을 하지만, 나에게 대학원은 오히려 K-타임라인의 불안감을 더 심화시켰다. 취업 대신에 택한 대학원이 그들은 노동을 할 때 나는 소비라는 행위를 더 하는 공간이 되었고, 이 과정에서 대학원에서 소비한 돈이 노동에서 더 합리적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진은 K-타임라인 속에서 내가 이룬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고 있었다. 일종의 남성성이라는 굴레 속에서 내가 쟁취했던 것은 '노오력'을 해서 쟁취한 것은 무엇인가 생각한 것이다. 그는 금융투자를 시도하면서 자신의 자산을 불려보려고 했으며, 그 과정에서 자신이 꾸준히 이 노동을 할 수 있는가에 의문을 느꼈다. 그는 '나'라는 사람에 대한 욕구 보다, 내가 이 사이클에 적응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진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남성성'이 무엇을 상정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지점이다. 소위 가부장제적 남성성은 자신이 가족의 생계를 지탱해야 한다는 억압 속에서 성취하고 쟁취해야 한다는 소유욕을 드러내게 된다. 자신의 동반자를 '안사람'이라고 표현하며, 앞서 언급하는 '성관계 중심사회'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나의 것'으로 만들려 하는 것과 비슷하다. K-타임라인 또한 그러한 맥락과 비슷하게 우진을 마주하는 것은 아닐지 생각한다. 학창 시절 선생님이 말했던, '성적이 미래의 아내를 좌우한다'라는 프레임은 대학으로 나의 취업과 결혼이 좌우됨을 강조한다. 그 과정에서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 나의 자본 능력은 '나'의 생산성을 강조하게 만든다. 아무리 자녀를 생산하는 능력이 좋다고 한들, 그것이 한국사회에서 이점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적인 '정상적인 삶'을 강조하면서 그런 억압 속에서 살아간다. 저자인 희제는 그러한 억압을 우진에게 강조하지만, 어쨌든 우진은 자기 책임을 강조한다. 사회의 굴레가 그렇게 자신을 만들어갈지라도, 그 속에서 결정권자는 '나'이기 때문이다. 탈타임라인을 한 우진으로써 자신이 선택한 경로에 책임을 지고, 자신의 타임라인이 '비정상'이 아님을 계속 증명해야 한다. 그러나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의 범주에 들어맞지 않는 성공은 오히려 괴리감을 만들면서, '내가 맞는가'에 대한 질문을 다시 자신을 향한 죄책감으로 돌려보내게 만들다. 
 

나가며 : 드러맞지 않는 삶에 대하여

  어쩌면, 우진이 생각하는 그 이야기는 '나'를 향하고 있을지 모른다. 초중고, 심지어 대학까지 서울이 아닌 타지에서 다녔다. 초중고 학창 시절에 공부를 결코 잘하는 학생도 아니었다. 그래서 대학은 사람들이 비웃을 수도 있는 '지방사립대학'에 갔다. 나의 할아버지는 내가 대학을 나오는 4년(어쩌면 군대를 포함한 6년) 동안 나를 부끄러워하셨다. 그러나 내가 대학원 진학이라는 경로를 선택하고, 소위 유명 대학의 합격증을 가지고 갔을 때에 할아버지는 미소를 지으셨다. 아마도 자신의 손자가 유수의 대학에서 수학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곳저곳에 자랑을 하고 다니셨던 것 같다. 내가 대학원에 입학하고 몇 개월 후 돌아가셨는데, 할아버지 지인들이 나에 대해 많이 언급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의아했다. 내가 대학원을 그곳으로 간다고 한국사회에서 말하는 소위 '학벌'이라는 것을 세탁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나는 대학 진학과정에서 나의 선택을 후회한 적도 없다. 그러나 주변에서 보여준 '시선'은 오히려 나에게 학벌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K-타임라인에 들어맞지 않는 나의 모습을 주변의 시선에 의해서 인식시켜준 것이다. 내가 조부모에게 들었던 남성성은 K-타임라인과 정확히 부합하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할머니께서 나에게 "좋은 여자친구 하나 구해와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말이다. 여성은 구해오는 대상이 아니기에, 그 권력적이고 폭력적인 단어에 거부감이 들기도 하다. 그러나 기존의 기성 이데올로기가 자리잡고 있지 않는한, 변화되는 남성성은 지속적으로 갈등을 겪어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기존의 폭력적이고 가부장적인 남성성이 좋다는 것은 아니다. 이제 새로운 남성성은 기존 권위와 가장으로써의 무게를 내려놓아도 상관없는 갈등의 시기에 놓여있다. 내가 또 다른 우진이라면, 나는 모든 것에 '남성성'을 가져다 붙이지 못할 것이다. 26년 남성으로 살면서 무엇이 남성성인지 규정짓지 못했기 때문이다. 울그락불그락하는 근육맨을 남성성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생각했고, 잘 가꾸는 남성을 남성성이라고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냥 나는 '나'로써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공부를 못했던 나, 군대를 좀 늦게 갔던 나, 대학원에 갔던 나를 생각해보면, 나는 'K-타임라인'이라는 굴레에 딱 들어맞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경로를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나의 길을 개척했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K-타임라인의 굴레는 소수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이룰 수 있는 굴레에서 돌아간다. SKY라고 불리는 대학에 나왔다고 누구나 잘 될 수 있는 사회는 지났다. 대학을 못 갔다고 실패했다고 불릴 수 있는 사회는 지났다. 스티브잡스가 고졸인 사실에 "저도 할 수 있어요"라는 문장을 내뱉을 때, "걘 걔고 넌 안돼"라는 문장을 내뱉을 시대는 지났다. 누구나 자신의 삶에서 충실하면 될 뿐이다. 그리고 사회는 그 충실함에 존경을 표하고 인정을 해주면 될 뿐이다. 인권은 그 안에서 정상적임을 외치게 된다. 사람이 죽지 않고 일할 수 있는 권리, 사람이 다치지 않고 일을 할 수 있는 권리, 사람이 원하는 시도를 해볼 수 있는 권리, 차별과 혐오 없이 온전히 '나' 자신을 정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권리 말이다. 가끔 내가 친구들에게 '나'의 삶을 이야기하면, 그들은 나를 '미친놈' 혹은 '특별한 놈'이라고 언급한다. 사회적인 K-타임라인에 어긋나게 행동하면서도 적절히 잘 올라탔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타임라인을 거부할 때, 인간은 더 희열감을 느낄 수 있다고 반론한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그 타임라인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사람이 될 수 없을 테니까.
  서론에 언급했던 서울 서부지법 사태를 이야기했다. 그들은 아마도 나 자신이 위협받고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기존의 기성세대가 그러한 남성성이 당연하다고 이야기했을 것이고, 그들은 잘못된 방식으로 국가를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을 형성했을 것이다. '잘못된 것'은 고치면된다. 다만, 사회는 왜 그러한 남성성을 구성했는가 조금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사회는 왜 그리 남성을 권위적 위치에 놓이게 하기 위해 억압했는가를 고민해봐야 한다. 아직도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억압은 무엇이 있나 토론해보아야 한다. 아직 68혁명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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