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중고, 학창 시절 넓게 펼쳐진 교정 속에 서있던 교훈을 생각해 보자. "일꾼"이라는 단어가 쓰여있는 학교가 많았다. 1970, 60년대에 설립된 학교에서 많이 보일 듯한 성실한 일꾼, 어진 사람이 되라는 '한 문장'은, "너희들이 다 컸을 때 성실한 노동자가 돼라"는 의미가 컸다. 당시 그들이 말하는 성공한 노동자가 되기 위해서는 옆의 사람을 이겨야 했다. 매 학기 두 번씩 공개되는 순위표는 내가 학교 내에서 어느 위치에 있는지 각인시켰다. 필자는 2010년대에 학교를 다녔다고 해도 무방한데, 게시판에 등수가 공개적으로 붙지는 않았지만 선생님이 보여주는 성적표에는 등수가 적혀있었다. 항상 하위권에 있던 나는 항상 좌절하는 사람이었다. 결코 노력해도 오를 수 없는 등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공부를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게 나라고 스스로 체화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 등수가 '등급'으로 바뀌었을 때, 나는 마치 내가 '소'가 된 것 같았다. 마치 A+ 한우는 되지 못할망정 3등급 한우로 싸게 팔릴 것 같다는 좌절 감은 결국 '실패한 인간', '쓸모없는 인간'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3학년 내가 선택한 지방사립대학에, 몇몇 친구들은 돈을 버리는 행위라고 웃었다. 결국 나는 성공하지 못한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스스로 부여하게 되었다.

홍콩 영화 <연소일기(2024)>에서는 자신의 고통을 아무리 외쳐도 소용없는 한 소년이 나온다. 부모가 원하는 틀에 맞춰서 살아야하며, 그것이 올바른 인생이라고 주입되는 환경 속에 소년은 성장한다. 그 틀에 맞게 생활하고자 하지만, 원활하게 되지 않는 소년은 자신의 모습을 자책한다. 옥상에서 가끔 시원한 공기를 맞기도 하며, 음악을 통해서 자신의 자유를 느껴보고자 한다. 그러나 부모는 좋은 음악은 완벽하게 연주하는 음악이라며 소년을 꾸짖고, 완벽하지 않는 사람은 쓸모없다고 각인시킨다. 결국 이 소년은 자신의 숨통을 틔우던 옥상에서, 자신의 숨통을 스스로 마무리한다. 이 소년의 동생은 소년이 숨을 마무리한 날, 자신이 행한 무시에 슬픔을 통념하며 우울해 한다. 그리고 소년의 꿈이었던, 선생님이란 꿈을 대신 이루며 어른이 된다. 모든 가족이 "쓸모없던" 소년을 소년을 잃을 순간부터 그리워하며 자책하지만, 결국 그들은 세상에 맞는 사람이라는 틀 속에서 자신의 자책을 감춘다. 이 영화는 "쓸모 있는 사람이 돼라"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잃어야 하는지. 쓸모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한 사람은 구조적 폭력을 얼마나 견뎌야 하는지 알려준다.

필자가 이 영화를 다시 꺼낸 이유는 최근 고용노동부가 '백수' 대신 '숨 고르기 청년'이라는 용어를 쓰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였다. 결국 "쉬었음 청년"이라고 불리는 비취업 청년이 상승함에 따라, 노동의 무능력을 증명하는 '백수'라는 단어 대신 노동을 준비하는 청년으로 부르기로 한 것이다. 즉, 취업을 하지 않은 청년을 '노동을 준비하는 청년'으로 규정하면서 그들을 사회생활을 준비하는 청년으로 체화하게 만든다. 이런 단어는 노동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현 사회에서 주요한 호명체제로 작용한다. '백수', '노동자', '비취업자', '쉬었음 청년', '숨 고르기 청년', '실업자'라는 단어 모두 노동이 당연하다는 사회적 논리 속에서 작용한다. 노동하지 않는 사람을 비정상으로 규정하면서, 그들을 나태한 인간 혹은 잠시 쉬어가는 인간으로 보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이 말을 하면, 공산주의자 혹은 세금먹는 하마라고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오늘날 우리는 일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 있는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20대 후반 취업자는 234만6000명으로 전년 동월 대비 6만 2000명 감소한 수준이었다. 이는 2017년 이후 가장 적은 수치였다(김성현, 2026.03.22.). 이를 기업의 경력직 선호 현황과 AI 이용 확산으로 주목하는 경향도 없지 않아 있다. 바로 업무에 투입하기 좋은 인력을 필요로 하면서, 일자리는 더 부족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투입 가능한 인력"이 어디에 있는가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대학에서 학문대신 '일 경험'을 가르치는 것이 마땅한가에 질문할 필요도 있다. 대학교라는 공간과 정체성은 바로 학문 증진에 있다. 교수는 기본적으로 연구를 하는 기관이고, 연구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기관이 대학이다. 그렇다면 일자리를 위해 대학을 오는 것이 맞는가에 대한 고민이 생긴다. 기업을 운영 및 관리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교육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고, 대학교가 이를 가르치는 것도 사실이다. 경영학 및 비즈니스 과목을 대학에서 수학해 보면, 어떻게 이윤과 운영관리를 효율적이게 할 것인가를 그간 연구되어 온 논문과 경험에 의거해 가르친다. 현재 기업은 어떠한 방식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는지에 대한 주목은 현재 대학에서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다만, 기업이 원하는 인력은 단순히 이러한 경험에서 나오지 않는다. 바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과 가르치지 않아도 되는 효율성에서 그 인력은 찾을 수 있다. 취업자 감소는 이 특성에서 나온다. 대학은 학생들의 취업을 책임지기 위해서 "기업에 맞는 교육"을 진행해야 하고, 자본주의에 귀속되어 그 기술과 지식을 정의라고 답한다. 대학교수들은 이 정의에 묶여 학생들의 취업에 전전긍긍 고민을 하는 것이 올바른가 골머리를 앓기도 한다.
기능과 형태를 잃어버린 대학은 효율성 없는 교육기관으로 남아버렸다. 사람들은 대학을 나오면 취업한다고 하지만, 소위 명문대를 나와도 취업이 되지 않는 현 상황에서 대학을 꾸짖는다. 왜 고등학교 시절 열심힌 노력한 대가를 제공하지 않는가에 대한 이유와 원인을 책임지라고 한다. 그것이 대학 탓인지는 명확하지 않은 상태로 말이다. 결국 학생의 쓸모를 대학이 만들어줘야 한다는 의미에서 대학은 어떻게 쓸모있는 기관으로 남을 것인가 궁리를 해야 한다. 대학의 입시 광고에는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취업률과 그 순위를 가장 크게 보도한다. 아울러 이러한 광고는 내 자식이 과연 쓸모 있는 사람으로 남을 것인가에 대한 선택 기준으로 작용한다. 필자는 꽤 오래전 나온 대학교에 화를 낸 경험이 있다.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을 온 직후였는데, 1년에 세 번은 취직을 했는지 묻기 위해서 전화를 했기 때문이었다. 취업률에 전전긍긍하는 대학의 모습에 화가 났을뿐더러, 학문이라는 과정은 결국 취직과 동떨어진 과정이라는 점에 화가 나기도 했다. "쓸모 있는 인간"은 자본을 모을 수 있는 인간으로 평가된다는 점에 화가 났다.
영화 <연소일기(2024)>에서는 주인공의 부모가 자녀들에게 "너희들은 홍콩대를 가서 법조인이나 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고소득 전문직이 되라는 것이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노력은 결국 재능과 자본의 힘을 이길 수 있으며, 그 결과 고소득 전문직으로 "쓸모 있게" 살아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쓸모는 단순히 고소득 전문직에만 한정되며, 중소기업이나 자장한 일들에 대해서는 쓸모를 인정받지 못한다. 한국 사회를 지탱한다고 믿어지는 몇몇의 대기업과 기술에 들어간다고 해서 과연 쓸모있어지는가에 대한 의문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사실 한국이라는 국가와 한국의 자본구조를 지탱하는 것은 소규모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몇몇 사람들은 중소기업은 없어져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자본주의 구조 속에서 하청의 하청을 주는 결과 중소기업의 일거리가 탄생한다. 볼트와 너트를 생산한다고 해서, 그것이 가치 없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상 속에 조일 수 있는 기술을 생산하는 것은 매우 사소해 보이지만, 그것이 없어서는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생산직이라는 직무아래서 그들이 무시를 받아서는 안된다. 그들의 쓸모는 인간의 매우 사소한 경험에 위치해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다시 돌아와서, 우리는 고용노동부가 호명한 "숨 고르기 청년"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나는 단순히 취업준비생, 숨 고르기 청년과 같은 노동을 준비하는 것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비노동자'라고 부르면 좋겠다. 단순히 취업을 한 것과 안 한 것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안 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아주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쓸모를 준비하는 청년"으로 부르지 않고, 존재 자체에서의 의미를 부여하는 호명방식이 필요하다. 쉬는 행위도, 준비하는 행위도, 개인사정으로 취업을 못하는 상황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를 무조건적으로 '쉬었음'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호명 방식과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울러 사회구조 내에서도 비노동 청년층에 대한 대책 또한 필요하다. 지속적으로 하락할 취업률과 실업률에 대해 "어떻게 취업을 시킬 것인가"을 대책회의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계를 어떻게 국가가 책임질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결국 쓸모를 만들어 주던가, 혹은 삶의 윤택함을 제공해 주는 대책이 필요하다.
영화 <월-E(2008)>를 보면, 우주선에서 인간은 노동을 하지 않고, 기계가 노동하는 그림이 펼쳐진다. 소수의 인간 만이 장치와 인간의 생존을 결정하지만, 이는 체제를 보존할 뿐, 기계의 노동력으로 인간은 윤택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만약 이것이 인간이 그리는 유토피아의 일종이라고 한다면, 인간은 '윤택한 삶', '노동하지 않는 삶'을 어떻게 호명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어른들은 청년들에게 왜 놀고먹으려고 하는지 충언 아닌 충언을 한다. 하지만 그들이 정작 생각해야 하는 건, 컴퓨터의 발전으로 없어진 전산직처럼 청년의 일자리가 없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광범위하게 말이다. 이 위기는 단순히 1990년대 후반, 전산직이 없어지는 것의 문제가 아니다. 청년의 일자리는 줄고, 40-60대의 일자리만 보전되는 세대계층이 생겨나는 것이다. 결국 이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축적 자본의 한계를 보여주며, 인간의 쓸모의 한계까지 드러내는 상황을 만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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