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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제, 무명으로 살아가는 은둔자
시사 비평

배들이 구조적 문제로 침몰하지 않기를...

by 이름 없음의 방랑 2026.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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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바다에서 가장 자유로운 녀석이 해적왕이다!
- 원피스 -

 

  우리가 바다를 동경하는 이유는 ‘자유로움’이라는 환상에 기반하기 때문일 것이다. 망망대해에서 나 혼자 바다 위에 떠 있다는 기분은 사회적 구조 속 억압에서 벗어났다는 감각을 형성한다. 위 사진처럼 태평양에는 수만 척의 배가 떠 있지만, 우리는 그들이 물살을 가로지르며 탐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비행기와는 다른 차원으로 다가온다. 단순히 평면 좌표에서 이동하지 않고 수직 좌표를 활용하는 이동 수단이어서 그럴까? 우리는 평면 좌표에서 더 큰 호기심과 탐험심을 느낀다. 마치 바다는 수직적인 건물과 사회 구조를 벗어난 자유롭고 평등한 세계이며, 『원피스』가 언급한 ‘해적왕’이 되기 위한 조건을 충분히 갖춘 공간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배에서는 ‘캡틴’과 ‘선원’ 같은 구성원 사이의 다양한 위계 체계가 존재하며, 해적과 달리 현실 사회에서는 항로를 미리 신고해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 선박은 결코 사회 구조 속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다. 따라서 배가 모험을 한다는 상상은 현실에서 실현되기 어렵다고 볼 수 있다.

  배가 모험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사회의 규율이 선박 내부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선박은 구조적 규율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모험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한다. ‘사회적 규율을 무시한 구조가 신뢰한 사람들을 어떻게 암흑 속으로 빠뜨렸는지’에 대한 사실과 경험을 말이다. 불과 14년 전, 내가 고등학교 1학년이던 당시 아침부터 담임 선생님은 교실에서 경기도 안산에 가족이 있는 학생들을 찾았다. 우리는 왜 그런 조사를 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불과 몇 시간 만에 수학여행을 간 학생들이 탄 배가 침몰했다는 사실이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물론 모든 학생이 구조되었다는 소식도 함께 퍼졌다. 그러나 내가 하교 후 집에서 뉴스를 켰을 때에는 사망자 수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이유는 ‘오보’ 때문이었다. 많은 신문사와 언론사가 최초 보도를 하면서 잘못된 내용을 전달했고, 그 결과 ‘전원 구조’라는 말은 잠시 안도감을 주었다. 그러나 구조하지 못했다는 진실이 드러나자 우리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당시 많은 고등학생이 충격을 받았으며, 또래가 죽음에 이르렀다는 사실에 함께 슬퍼했다. 특히 이 죽음이 구조적 문제로 인해 발생했다는 사실에 더 분노했다. 한 선사의 욕심과 대피 실패, 그리고 가장 높은 위치에 있던 선장과 일부 선원만의 탈출은 결국 사고 속에서 살아남는 사람은 특정 소수 집단일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

  특히 당시 정치와 언론은 자극성을 추구하며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욕망이 더 크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 또한 컨트롤타워의 부재와 혼선으로 인해 국가가 사고에 대처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체계적인 방안도 마련되지 않았다. 이에 많은 소방 당국과 해경은 혼선된 정보와 방향성 속에서 구조를 더욱 지연시켰다. 이 과정에서 세월호는 누군가의 추억과 미래, 그리고 소중한 인연과 함께 가라앉게 되었다. 결국 이 사고는 우리에게 누군가의 이득과 욕망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피해와 희생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점을 각인시켰다. 사고를 수습해야 할 책임자와 담당자가 사고의 실상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는지만 계산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를 보여 준 것이다. 결국 당시 해당 사고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시스템을 개선하는 한편, 사고 이후 약 2~3년간 모든 학교의 수학여행은 중단되었다. 따라서 많은 학생은 세월호를 추모하며 더 이상 희생이 반복되지 않기를 강요받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내가 학창 시절 다양한 사고를 겪었지만, 세월호는 국가의 구조적 문제가 누군가의 희생으로 나타난 사고였다. 이는 인재(人災)였고, 대책도 제대로 세워지지 않은 사고였다. 우리는 해당 사고를 기억하고 추모해야 한다. 단지 수백 명이 희생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가 세월호를 잊었을 때 다시 나타나는 사고는 또 다른 인재다. 이태원 사고와 제주항공 사고들 역시 이러한 대처 능력의 부재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의 희생을 기억하며, 국가에 이 제도의 미비함을 개선하도록 요구해야 한다. 벌써 14년이 지난 오늘, 누군가의 희생으로 인해 오늘의 내가 존재하고 있다. 국가는 그들의 희생을 마음 속에 기억하며, 함께 추모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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